[글] 저무는 해에 끊어진 희망이 서리더라도

2020. 10. 28.Backup/커미션

[누몽] 님께 맡긴 커미션입니다.

개인적으로 읽으려고 백업합니다. 시간이 나신다면 읽어주세요.

 

# 주의 

도시악몽 2라인 3루트에 해당하는 스토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필립->유나 정도의 감정선을 상정하고 맡긴 커미션이었습니다.

접은 글을 열면 바로 본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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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간에 힘을 푼다. 서서히 드러나는 각막 위로, 찬란한 빛이 쏟아진다. 보드라운 아침 햇살. 창밖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잿빛 건물의 행진. 낯선 이들의 웃음소리. 풍경화 한 폭, 가장 구석 자리에 그려진 사람에게서나 느껴질 희미한 존재감과 당연함이 몸을 가볍게 감싼다. 이토록 평화롭던 날이 있었나. 문득 가슴께를 밀고 들어오는 이질감에, 다시 닫히려던 눈꺼풀을 성급히 들어 올리며 몸을 바로 세웠다.

 

 

- 일어났어?

- …선배?

 

 

툭. 가벼운 마찰음이 천과 천 사이를 가로지른다.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있는 걸까. 무언가 말을 하기 위해 벌렸던 입술을 닫지도 못하고, 그저 뻐끔거린다. 분명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겠지. 선배는 옅은 미소를 띤 채, 반쯤 흘러내린 내 안경을 고쳐 씌워준다. 필립, 요새 네가 워낙 기운이 없길래. 영감님이 하루 휴가를 주셨잖아? 딱히 할 일도 없던 내가 같이 놀이공원에 가자고 했고. 담담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맴돈다. 그런 약속을 했던 것도 같다. 그리 생각하니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던 희뿌연 안개가 가라앉는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후, 시야를 창가로 옮겼다. 열차는 어느덧 맑게 갠 하늘과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 워프 열차도 좋지만, 가끔은 이런 낡은 방식도 좋다고 생각해.

- 그렇, 네요. 평소엔 하늘을 올려다볼 생각도 잘하지 못하니까요.

- 그렇지?

 

 

선배의 말에, 입꼬리를 살포시 올려본다. 마지막으로 당신 앞에서 제대로 웃어본 게 언젠지, 이제 기억도 나지 않지만. 다행히 그 행동이 충분히 대답이 되었는지, 선배의 눈꼬리 역시 내 입가를 따라 가늘게 휘어졌다. 머지않아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촌스러운 벨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진다. 처음 듣는 역이름과 기관사의 도착을 알리는 목소리. 아이들의 환호성과 벨트를 푸는 무기질한 소리. 나와 당신 역시 그속에 녹아든다.

 

 

 

 

몇십 년 전까지, 유희를 위해 단순한 운동을 반복하는 기계를 모아둔 장소가 있었다고 한다. 그게 아직 사라지지 않았을 줄은. 이걸 놀이공원이라고 하는구나. 잠결에 들었던 당신의 말을 떠올린다. 도박이나 술, 약물, 재료가 뭔지 알 수 없는 요리. 흔히 도시 사람들이 즐겁다고 생각하는 것들과는 동떨어진 형형색색의 기계들은 허술하다 못해 조잡할 정도였지만, 좀처럼 눈을 떼기 어려웠다. 적어도, 구식 기계에 몸을 맡긴 사람들의 표정에선 찌든 피로나 말 못 할 사정 따위를 읽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 뭐부터 탈래?

- …네?

-  구경만 할 건 아니잖아?

 

 

선배의 손이, 내 팔을 감싼다. 말을 더 이어갈 겨를도 없었다. 아니, 선택지가 없었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나는 선배의 몸이 나아가는 방향으로 그저 끌려갈 뿐이다. 꿈과 현실, 그 사이에서 외줄을 타는 듯한 붕 뜬 감각이 싫지만은 않았다. 선배는, 내가 기억하는 것 중 가장 들뜬 얼굴로 바로 앞의 어트랙션을 가리킨다. 작은 차량을 여러 개 연결한 기구가, 실타래처럼 엉킨 선로를 달리고 있다. 조금 전 우리가 타고 왔던 열차와도 비슷한 모양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차량을 덮는 뚜껑이 없다는 점과 길이 허공을 한 바퀴 휘감거나 수직으로 낙하한다는 정도일까. 정말 탈 거예요? 혹시 무서워? 실없는 대화였다. 말리거나 거절할 틈도 없이, 나는 선배와 함께 열차의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그 뒤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차갑다 못해 시린 바람이 볼을 스치고, 누구 것인지 모를 비명이 한데 엉켰지. 아마, 꽤 추한 꼴을 보였으리라. 간이 벤치에 걸터앉아 한숨을 쉰다. 이건 이거대로 힘들지? 해결사 일이랑은 다른 의미로. 선배는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다른 어트랙션을 훑어보고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이 스릴만 넘치는 놀이기구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일까.

 

 

- 잠시 쉬고 있어. 마실 것 좀 사 올게.

 

 

맞은편 카페로 뛰어 들어가는 그를 가만히 바라본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일상 속에서도, 선배의 등은 올곧고 믿음직스럽다. 그 뒷모습을 닮고 싶다고 생각하며, 당신을 눈으로 좇았다. 뒤가 아닌 옆에 서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란히 서는 날이 오길 바랐다. 지끈, 머리가 울렸다. 결코 입에 담을 일 없는 감정을 짓밟힌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아직 현기증이 채 가시지 않은 탓이겠지. 한숨과 함께 눈가를 쓸어내렸다.

 

카페인으로 목을 축인 우리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선배의 선택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하늘 끝에서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기계에 몸을 실었을 땐, 어떻게 되어버리는 줄 알았다. 한 뼘 정도 여유가 남는 허술한 안전벨트. 희미해지는 중력. 몇 시간처럼 느껴지는 수 분. 땅으로 다시 내려왔을 땐 기어 올라온 멀미를 뱉어버릴 뻔했지만, 입에서 나온 건 앓는 소리가 아닌 뻥 뚫린 듯한 웃음소리였다. 고개를 들면, 멀지 않은 곳에 선배의 얼굴이 있었다. 미적지근하지 않은 개운한 반응을 줄곧 기다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의 마음에 남은 마지막 한 떨기 불안을 털어주고자, 서둘러 손을 들었다. 이번엔, 저거 어때요? 적어도 30분은 기다려야 차례가 올 듯한 긴 줄이었다. 쉬고 싶으면 말하지. 선배는 한 눈을 감으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답한다. 아, 아니에요! 인기가 많은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말을 갈무리하기 전에 손과 손이 맞닿는다. 공방에서 만든 장갑이 아닌, 맨 손가락으로 선배와 얽혔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붉어지는 귓가를 보지 못한 것인지, 그는 쾌활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무리 무서워도 무르기 없기야!

 

큰 폭으로 좌우를 오가는 해적선, 파스텔톤의 관람차, 벽면이 거울로 된 미로. 한나절이 지났을 즈음엔 이 공원에 있는 대부분의 기구를 탄 후였다. 숨을 돌릴 겸 들렀던 기념품점의 인형뽑기 기계에서 뽑은 콧수염이 달린 봉제 인형이 꽤 마음에 든 것인지, 선배는 인형을 양팔로 꼭 끌어안은 채 콧노래를 불렀다.

 

 

- 이 녀석 이름은 필립으로 하는 게 좋을까? 네가 뽑았으니까.

- 생긴 것만 봤을 땐 스승님의 이름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나요?

- 아하하. 살바도르라. 영감님한테 드릴까? 아내분이랑 약속이 있어서 못 오셨잖아.

- 스승님 선물은 나중에 나갈 때 하나 사요. 그건 선배한테 드리고 싶어서 뽑은 거니까요.

 

 

선배는 그저, 내 목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는 듯했다. 나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노을이 탁한 푸른색에 먹혀간다. 묵직한 침묵이 나와 당신의 거리를 벌린다. 가끔은 어린애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그렇네요. 즐거웠어요. 그리고. 말끝을 흐리자, 십 수 개의 씨앗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빨강. 주황. 노랑. 익숙한 색이 피고, 진다. 불씨와 불꽃은 모든 걸 집어삼킨다. 소리도, 어둠도, 빛도, 기억도. 

 

 

- 기억해? 내가 불꽃놀이가 보고 싶다고 한 거.

- …네?  

- 하긴, 넌 아침부터 계속 졸고 있었으니까. 기억 못 하는 게 당연한가. 그래도 난 충분히 만족했어. 오늘 하루는 미련이 없을 정도로. 너는 어때?

- 그건, 저도 그래요. 오늘 일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 반은 거짓말이네.

- 선배?

 

 

미련이 없다니. 너는 아직도 나를 놓지 못하고 있으면서.

 

 

시야가 일렁였다. 가벼운 폭발음이, 고장 난 TV에서 흘러나오는 잡음으로 변한다. 눈 가장 안쪽에서 피어오르는 안개. 노이즈.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곧 화를 토해낼 것 같은 얼굴로 미소짓던 선배의 얼굴이 무너진다. 진득한 붉은 빛이 스며드는 바닥. 빛이 되어 흩날리는 목숨. 그래.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혼자서 달아났다. 내가 도망쳤다는 사실조차 받아들이지 못해서, 현실에서 눈을 떼어냈지. 달다 못해 혀가 녹아버릴 지독한 꿈에 몸을 던지면서까지.

 

 

 

 

오늘의 꿈은 어떠셨나요? 덧없지요? 몹시 즐거워서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는데 말이에요. 안심하세요! 당신은 앞으로 영원토록, 이렇게 즐거운 꿈을 꿀 수 없을 테니까요.

 

 

날카로운 비웃음이, 고막을 찌른다. 색바랜 녹의 냄새가, 코끝에서 아른거린다. 또, 눈을 떴구나. 차라리 그대로 꿈속에 묻혀버렸으면 좋았으련만.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뒷골목에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낡은 열차를 타면 괴로운 기억을 지워준다는 소문을 듣고 뛰어들었을 뿐이다. 아주 잠깐이지만, 소중한 이의 죽음을 잊을 수 있었다. 맞은편 차창을 바라본다. 뉘엿뉘엿 지는 해 위로, 하얗게 질린 얼굴이 떠오른다. 눈물 자국으로 마를 새 없던 눈가가 깨끗하다.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는, 텅 빈 표정이다. 지독한 악몽이라는 신호를 몇 번이고 업신여기면서까지 꿈에 머문 덕분이겠지.

 

 

정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네요. 미련이 없다는 말도, 이젠 거짓말이 아니에요.

 

 

멈춰선 열차의 문이 열린다. 발을 내디디면, 건조한 공기가 목으로 넘어왔다. 아. 끝나지 않길 바랐던 오늘의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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