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C] 그녀를 천상의 여인이라 부르지 말고

2020. 10. 29.Backup/커미션

@ULTRAVI0LETNCE 님께 맡긴 할로윈 테마 에카르 글 커미션입니다. 

개인적으로 백업합니다. 당연히 로보토미 코퍼레이션 엔딩까지의 스포가 있습니다. 

작업할 때 들었던 곡: The Beatles; Hey Jude (cover by 최진솔) - https://youtu.be/x40W1njnc4Y 이라고 들었습니다.

 

 

 

 

 

 

 

 

 0.

 그녀를 천상의 여인이라 부르지 말고, ¹

 

 

 1.

 아인은 인간이다. 그것도 아주 유난스러울 정도로 평범한 인간.

 물론 여러 회사와 날개들에서 연구직을 꿰찬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듯 조금 똑똑하기야 했지만, 그마저도 그뿐이다. 딱 인간의 수준에 멈춘 지능, 그보다 조금 떨어지는 감수성, 적당히 무감하고 무심하여 필요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인간 아닌 척 행위할 수 있는 성향.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 따위로 시작하는 지리멸렬한 수사를 나열해도 위화감 없을 정도로 굴곡 없는 인생에 몰이해를 심드렁하니 넘기는 성정, 마지막으로 이공계 연구직이라는 직업마저 겹쳤으니,

 아주 당연히, 그의 삶은 단 한 번도 오컬트 따위와 연관된 적 없었다.

 

 

 2.

 10월 마지막 날. 연구실이 드물게도 적막했다. 할로윈을 맞아 엘리야를 선두로 한 연구원들이 전부 파티의 명목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들의 틈바구니에 끼지 못한─않은─아인은 홀로 자리에 앉아서 볼펜 끄트머리를 씹으며 지오반니의 코기토 주입 과정과 경과에 대한 서류를 읽고 있다. 시계 초침이 째깍거리며 돌아가는 소리.

 아인은 죽음이 몰고 온 이 적막이 기꺼웠다. 기실 파티 따위의 명목을 붙여 어떻게든 아이들의 토라진 심성을 달래려는 무리에 끼고 싶은 마음도 없었거니와 지오반니 및 리사와 잠시나마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도망칠 곳도 얼마 없는 이 단출한 연구실 내에서, 그들의 눈동자를 바라볼 때 느껴지는 이유 모를 후회와 회한 그리고 자책과 죄책감 비슷한 것들을 피하기 위해 조우를 꺼리다 보면 자연스레 집중이 흐트러지기 마련이었으므로. 그들이 제 발로 연구실을 빠져나가 준 덕에 짧은 시간이나마 연구에 더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지오반니의 상태 보고서를 제대로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두레박과 코기토와 지오반니의 상태와 결론적으로 마음의 병에 대해서 더 자세히……,

 자세히……, 속이 메슥거린다. 머리카락이 한참 길어진 지오반니. 그의 손톱을 깎아주던 가브리엘. 남몰래 울고 있던 미쉘. 소리를 지르다가 방에 틀어박힌 리사. 그리고…….

 

 정적을 깨부순 노크 소리는 볼펜 끄트머리가 거의 떨어져 나갈 지경이 되었을 때 울렸다. 벌린 입에서 펜이 떨어져 플라스틱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구르고 나서야 아인은 제가 다리를 심하게 떨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급히 서류를 갈무리해 정리한 아인이 물끄러미 그리고 집요하게 문을 쳐다본다.

 하지만 문 너머가 보이는 일은 없었다. 무언과 정적을 항의하기라도 하듯, 혹은 집 안에 네가 있음을 안다고 주장하기라도 하듯 다시 울리는 노크 소리. 문앞의 불청객이─멀쩡히 작동하는 초인종과 인터폰이 달렸음에도─구태여 빗소리에 먹힐 소지가 다분한 노크를 택한 이유를 합리적인 아인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짜증스럽고 성마른 목소리로 대꾸하며 아인이 슬리퍼를 느적느적 끌었다. "예. 나갑니다. 누구시길래 이 늦은 시간에," 그리고,

 

 "으응. 아인. 나야……." 아인이 숨을 멈춘다.  "문 좀 열어줄래? 밖에 비가 많이 와서, 추워."

 

 

 3.

 재차 이야기하지만 아인의 삶은 단 한 번도 오컬트 따위와 연관된 적 없었다.

 뭍으로 내던져진 금붕어마냥 입을 몇 번이고 빠끔댄 아인이 미간을 잔뜩 좁히며 성큼성큼 현관으로 걸었다. 당혹과 공포 미미한 회한 따위는 퇴색된 지 오래였고 되려 이 질 나쁜 장난이 함의하는 악의를 곱씹고 나니 분노가 세차게 들끓어 속을 살랐다. 분노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는 것, 빠듯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마저 버거워서, 차가운 문고리를 콱 움켜쥐며 아인은 아주 오랜만에 자신이 살아 있음을 감각한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절대로 그냥 보내주지 않으리라. 바닥에 꿇어앉아 잘못을 빌고 몇 번이고 머리를 박게 만들으리라. 아주 엉망을 만들어서 얼굴을 으크러뜨리고 울게 해주리라. 감히 이따위 삿된 장난을 친 대가를 치르게 해주리라. 그런 다짐과 함께 문을 세차게 열어젖히자,

 문을 열고 나자……,

 

 카르멘은 흰 가운과 갈색 머리칼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분명한 죽음을 목도하고 이후 직접 그 몸뚱이를 처리하기까지 한 아인으로서는 당혹스럽게도, 조금도 부패하거나 썩어 문드러지지 않고 외려 볼이 복숭앗빛으로 발그레하게 빛나는 멀쩡한 인간의 꼴이었다. 그러니까 마치,

 마치 죽음을 극복한 것처럼. 죽음의 주박에서 자유로운 영혼인 것처럼. 눈이 마주치자 카르멘이 웃는다. 그는 멋대로 문지방을 넘는 대신 가라앉은 고요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진다. "들어가도 돼?" 꼭 애들 줄 사탕 사 왔어, 오늘 할로윈이잖니. 이야기하는 것처럼 아주 여상스럽고 조금은 쾌활하기까지 한 어조였다.

 

 

 4.

 아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 좋은 머리를 원망했다. 얼어붙은 몸과 달리 오감은  빠르게 주위 상황과 사물을 스캔하고 읽어 잘 갈무리된 정보를 꾸역꾸역 뇌리에 주입하고 있었다. 카르멘의 것, 카르멘의 목소리, 카르멘의,

 카르멘의 눈. 그 순간부터 아인의 머리는 멋대로 낯선 이의 침범을 허락하거나 반대로 문전박대하거나 혹은 그의 말꼬투리를 잡는 대신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이 상황의 여러 가능성을 재기 시작했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카르멘의 저질 레플리카일지도 모른다. 태양 뜨거운 줄 모르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날개들의 기술을 차용한다면 죽은 이의 형상을 복제하는 것 정도는 쉬울 테니까. 혹은 제가 예상했듯 그저 누군가의 질 나쁜 장난일 수도 있다. 날개에서 카르멘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을 리 없으니 기분은 나쁠지언정 차라리 이게 더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아주 유쾌하지 않은 가정이었지만, 아인이 마침내 아주 돌아버려서 야릇한 헛것을 보는 걸지도 몰랐다. 문고리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 심하게 떨리고, 관절과 마디가 불거져 하얗게 질린다.

 대략 일 분의 고착 상태가 지난 후 아인은 어느 가설을 채택하든 문 앞의 이 여자가 진정 '그녀'일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러므로 아인은 여자를 들여보내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세 가지였다─첫 번째 가설을 채택하여 정중하게 돌려보내거나, 두 번째 가설을 채택하여 차마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지저분한 욕설을 떠안기거나, 마지막 가설을 채택하여 아인이 정신병원으로 향하거나. 그러나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치는 눈이,

 바깥에 가만히 서서 머리칼과 옷자락에서 빗물을 뚝뚝 흘리는 여자의 눈이 너무 붉어서,

 그토록 불멸에 가까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는데,

 "……내가 감히, 어떻게 너를 거절할 수 있겠어?" 아인은 제 목소리가 아주 형편없이 들린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문 밖에서는 빗물 젖은 땅 특유의 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섞여 뒤엉키는 무덤 냄새.

 

 카르멘은 방긋 웃으며 감사 인사를 건네곤 연구소 안으로 들어선다. 빗물 떨어지는 가운을 벗으며 "오랜만이다. 그치?" 한 카르멘 너머, 연구소의 문을 걸어 잠가 외부 소리를 차단하고 나서도 한참을 멍하니 문간에 서 있던 아인 때문인지 연구소 안이 다시금 적막해진다. "아인, 거기에 계속 서 있을 거야?" 의아한 낯의 카르멘이 말을 건네고 나서야 아인은 못 박힌 듯 붙박여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발을 뗐다.

 시선이 마주친다. 형편없이 떨리는 벌꿀빛 눈동자와 고요히 일렁이는 핏빛 눈동자가. "그러니까, 카르멘. 이건……."

 "별거 아냐. 그저 오늘이 할로윈인 탓이지." 고저가 없고 다소의 운율마저 느껴지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따위를 낭송할 때나 어울릴 법한 목소리. 지오반니에게 책을 읽어주는 가브리엘의 목소리도 이보다 더 정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하는 마냥 감흥 없이 이야기하던 카르멘이 눈을 삼박이자 발그레한 뺨에 속눈썹 그림자가 졌다. "잃은 것─대체로, 죽은 자─이 돌아오는 날이잖아." 아인은 납득했다. 분명 숨이 멎었을 카르멘이 제 눈앞에서 붉은 눈을 끔뻑이며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했으므로, 납득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가운을 테이블에 올려둔 카르멘이 제가 좋아하던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다리를 흔들며 콧노래를 흥얼댈 동안 아인은 온갖 과학적 근거를 들어가며 상황의 비현실성을 지적하는 대신 드라이기의 전원을 켜고 여전히 푹 젖은 카르멘의 머리칼을 말리기 시작했다. 손끝에 감겨오는 갈색 머리카락, 끄트머리가 조금 상해 갈라졌다. 물에 흠뻑 젖어 빛이 짙어진 곰인형 머리끈마저 정말 살아 있는 사람의 것처럼 느껴져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어렵다. "……른 사람들은," 바람 소리에 카르멘의 음성이 묻히자 아인이 서둘러 드라이기의 전원을 껐다. "다 어디에 갔어?" "……미안, 바람 소리에 묻혀서 못 들었어. 다시 말해줄래?" "다른 사람들은 전부 어디에 있어? 이 연구소가 이렇게 조용하니까 기분이 이상해. 원래는 왁자하고 따스했는데."

 침을 삼키는 대로 목울대가 울렁인다. "……할로윈 파티를 준비하러 간다고 했는데," 아인은 알맞은 단어를 찾기 위해 뇌리에서 넘실대는 어휘의 늪을 필사적으로 헤매고 있다. 네가 죽은 후로 우리는 완전히 무너져내렸어, 마치 신의 저주를 받은 바벨탑처럼. 리사는 하루 온종일 말을 하지 않고, 칼리의 흡연량이 늘었고 벤자민은 내 눈치를 보느라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마냥 굴어. "다 같이 밖에 나갔겠지. 아기자기한 분장을 하고 말야." 아인은 제 앞 고귀하고 아름답고 비장하여 이데아가 아닌 어느 곳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을 존재에게 감히 제가 목도한 멸망을 고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 좋은 머리로는 자책과 비탄에 일그러지는 카르멘의 얼굴이 아주 쉽게 그려졌던 것이다. "아마 사탕도 잔뜩 받아올걸. ……그러니까 늦게까지 안 돌아올 거야. 그들은 걱정하지 마. 벤자민이랑, 칼리도 같이 나갔어. 전부 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경련하는 손아귀에서 드라이기가 미끄러진다. 날카롭고 둔탁한 소리에 눈을 크게 뜬 카르멘이 급히 테이블에서 일어나서 바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펄럭이는 옷자락, 드러나는 손목.

 상처 하나 없고 석고처럼 매끈하며 주검처럼 창백하고 대리석처럼 하얀 손목. 분해된 드라이기의 노즐을 잡아채는 아인의 손이 카르멘의 것보다 빨랐다. "괜찮아." "아인." "미안, 정말 별거 아냐. 잠깐 손을 떨었어. 미안해. 그냥 분해된 거니까 다시 끼우면 돼. 그러니까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절대로 가지 말고, 죽지 말고, 그곳에서 영원히, 정박한 풍경화 속 사물처럼 앉아서. "……이건 내가 치울게. 그동안 이야기를 해줘. 네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입술을 달싹이던 카르멘이 별다른 반박 없이 제가 앉았던 자리로 되돌아간다. 어쩌면 낯짝의 기저 아인이 삼켜댄 수많은 상념─우울, 다량의 기대 그리고 소량의 절망과 환희─을 읽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미련 없이 다시 테이블에 걸터앉은 카르멘이 입술을 앙다물고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가 화제를 생각할 때면 흔히 내보이던 버릇이었으므로, 아인은 안심한다. "하지만 말하려고 해봐야 말할 것도 없는데. 아…… 생각났다." 표정이 미세하게 밝아진다. "나 요 앞 크루아상 가게에 가고 싶어. 많이 못 먹어본 게 후회돼."

 그의 욕망에 대해 들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이 상황이 불편한 동시에 눈물이 날 정도로 황홀했다. 질박한 어조로 죽음을 입에 담는 카르멘의 콧잔등에 빛무리가 져 양감이 생긴다. "와플을 먹을 때 고민 않고 딸기를 추가하고 싶어. 칼리를 데리고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고 싶고, 리사에게 그 애의 몸보다도 큰 곰 인형을 안겨주고 싶어. 와인 장식장을 체리 나무로 짠 더 좋은 걸로 바꾸고 싶고, 또……."

 그러나 도열한 카르멘의 후회에 아인은 없었다.

 "그러니 아인, 너는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라. 하고 싶은 걸 해." 드라이기의 잔해를 갈무리한 아인이 고개를 든다.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카르멘은 대답 없이 작게 웃는다. 아인의 벌꿀색 눈에서 끔찍할 정도의 공포와 애정을 읽어낸 모양이었다. "나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나도 보고 싶었어, 아인. 우리 크루아상 먹으러 갈까? 말하고 나니 배고프다."

 

 맥락 없이 툭툭 끊어지는 대화를 이어가는 대신 아인은 드라이기의 전선을 정리하며 다른 고민의 물꼬를 텄다. 크루아상 가게가 언제 휴무던가, 비록 시간이 늦어 갓 구운 따뜻한 크루아상을 받지는 못해도 지금 간다면 다 식은 제과나마 어렵지 않게 구매할 수 있으리라…… 카르멘의 상태가 어떤지 모르니─아인은 이제 저도 모르는 새에 카르멘을 완전히 '산 자'로 취급하고 있었다!─두고 혼자서 나간다면 금세 다녀올 수 있다. 왕복으로 채 이십 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나가라고? 이 적막하고 고립적인 장소에 카르멘을 혼자 두고? 기실 아인은 카르멘을 쭉 제 시야에 담아두기 위해 아주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시야 바깥으로 벗어난 그가 언제 유령처럼 사라져버릴지 모르겠어서.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고개를 기울인다. "싫어? 아니면 다른 거 할까?" "……아니. 좋아. 내가 가서 사 올게, 너 아직 비에 젖은 옷도 다 안 말랐잖아. 금방 다녀올 테니 너는 몸이라도 녹이고 있어……." 하지만 내가 어떻게 감히 네게 싫다고 이야기하겠어.

 

 

 5.

 아직 식지 않아 따끈한 크루아상 봉투를 품에 안고 빗줄기 속을 지나칠 동안 아인은 수백 가지의 우스꽝스럽고 다소 광적인 생각을 했다. 대체로 카르멘에 대한 생각이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어쩌면 정말로 카르멘이 돌아온 건 아닐까? 사실 나는 카르멘이 죽는 아주 긴 꿈을 꿨던 거고, 카르멘은 그 야릇한 꿈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시 살아서 내 앞에 나타나 준 게 아닐까? 어쩌면 내게 나의 죄악과 실수를 되돌릴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 건 아닐까? 어쩌면 이제야 이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거고,

 바보 같은 모순과 결점투성이의 생각이 하릴없이 희극적으로 흐르다가, 멈춘다. 왁자하게 떠들며 연구소 쪽으로 이동하는 엘리야 일행의 모습을 목격하고 나서야 비로소 모든 망상이 산산조각났다. 짧은 정적,

 그 순간 아인은 저도 모르게 달음박질을 쳤다. 그들보다 앞서 달려 연구실에 도착해서 카르멘을 숨겨야 한다는, 감히 저 아닌 그 누구에게도 카르멘의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발에 밟히는 웅덩이에서 끔찍하게 찰박이는 소리가 났다. 훅 끼치는 빗물 비린내.

 그것은 기실 광증의 일환이기도 했다. 급히 연구실의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선다. 금실로 가게의 이름이 박히고 작은 펄이 뿌려져 고급스러운 진줏빛 광택이 나는 종이봉투를 한 손에 든 채 아인은 당황하여 몸을 일으킨 카르멘의 손목을 무작정 잡아끌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방─아인의 개인실─에 그를 밀어넣고 문을 잠그는 동안 맞닿았던 손끝과 손목,

 손목의 안쪽에 맞닿은 손끝에 너절한 살점 따위는 없었다. 그것이 아인을 현실로 끌어당긴다. 이토록 무섭고 궁벽한, 긴박하고 아주 무도하며 처절하도록 지고하기까지 한 현실. 카르멘은 죽었다는 것. 울컥울컥 흘러넘치는 핏물 향이 비릿했던 욕조는 결코 몽중의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러므로, 카르멘이 아인의 사랑이 되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결말은 없으리라는 것…….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열리는 소리와 왁자한 대화가 들려왔다. 창날에 꿰인 사슴마냥 신경을 곤두세우고 나니 음성의 주인을 퍽 쉬이 파악할 수 있었다. 벤자민의 웃음소리, 조금 퉁명스러운 투이지만 기분이 나쁜 것 같지 않은 칼리의 목소리, 흐드러진 갈대마냥 나붓한 다니엘의 목소리와 약간의 희열이 묻어나는 아이들의 목소리. 그들이 아주 희극적인 할로윈을 보냈음을 아인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의 정적.

 이윽고 아인은 저를 올려다보는 카르멘의 눈동자에 시선을 맞춘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카르멘, 여기에 가만히 있어 줘. 나오지 말고……."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던 카르멘이 다시금 입을 다문다. 그 순간 아인은 제 표정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을지를 상상하다가 그만둔다.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다. 카르멘을 홀로 남겨둔 채.

 

 

 6.

 자정이 가까워오고 있다.

 마침내 짧은 안부 인사와 할로윈 파티에 대한 시답잖은 담화─지오반니와 미쉘이 얼마나 이 깜짝 외출을 좋아했는지, 엘리야가 얼마나 눈부시게 웃었는지, 칼리가 둥지의 할로윈 문화에 얼마나 질색을 했고 다니엘이 카푸치노 맛 사탕에 관심을 보였는지─를 끝마치고 나서야 아인은 다시 개인실의 문을 열었다. 행여 누군가 카르멘의 모습을 볼까 아주 조심스럽고 정교한 손짓으로.

 카르멘은 아인의 침대에 앉아 책상 위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구토증과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불안감 그리고 미칠 것 같은 편두통에, 아인이 숨을 헐떡이고 인기척에 카르멘이 고개를 든다. 그리고 찌르듯 날아드는 목소리. "왜 나를 숨기는 거야?" 무구한 목소리가 폭포처럼 쏟아지는데 아인은 그것이 진실로 무고한지 혹은 그저 가장일 뿐인지 감히 정의할 수 없다. "응? 아인. 나도 저들을 다시 보고 싶어. 아마 나를 보면 저들도 좋아할 거야. 어쩌면 너만큼 나를 그리워할지도 모르고……."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너를 가장 후회했고, 내가 너를 가장 그리워했고, 내가 너를 가장, 카르멘,

 "나는 그냥," 목이 메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덫에 걸려 무력화된 지금 이 순간의 아인은 취약하기 짝이 없다. 저지르고 방관한 모든 일들, 핏물이 뚝뚝 떨어지던 욕조, 공업용 칼과 아예 잘려나가 희끄무레한 뼈가 드러난 손목, 그리고 카르멘의 붉은 눈동자.

 핏빛 눈동자. 시선 그 어디에도 책망의 빛이 없어서 딱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똑바로 서는 법을 잊고 휘청이다 간신히 책장을 짚어 몸을 지탱한 아인이 앓는 소리를 냈다. 스스로가 징그럽고 추저분해 참아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너를," 독식하고 싶어서…… 네가 다시는 도망치지 않으면 좋겠어서, 네가 다른 사람들을 보고 나면 그들에게 더 환히 웃어줄 것 같아서, 그리하여 마침내 더 나은 사람들 사이에 끼게 된 네가 나를 구역질 나는 인간이라 매도할 것 같아서,

 너를 그렇게 죽게 내버려 둔 걸 너무 후회해서, 한시라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어서, 일주일 내내 네 꿈을 꿔서 잠을 설쳐서. "카르멘, 나는 그냥." 이러고 나서도 너를 사랑하는 내 자신이 너무나도 지저분해서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서, 숭고하도록 처절하며 광적인 이야기가 내장 속에서 넘실대는데 아인은 뱉어낼 방식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언어를 잃은 어린 짐승이 되어 헐떡이며 카르멘을 바라본다.

 그리고 물끄럼 아인을 들여다보던 카르멘이 나긋이 웃었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아인의 음습하고 무도하고 추저분하며 다소 반사회적이기까지 한 감정이 전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진실로 아인의 사랑이 되어줄 수 있다는 듯이.

 그 순간 아인은 세상의 모든 무화과 잎사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들의 색은 이제 허리 언저리를 맴도는 지오반니의 머리칼을 꼭 닮아 있었다.

 

 

 7.

 오랜 정적이 있었다.

 카르멘은 조금 희게 질린 맨다리를 흔들며 아인의 침대에 앉아 와인의 맛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인의 바람대로 나가는 것을 포기한 모양이었지만 대신하여 그는 지오반니의 상태와 미쉘을 향한 애정 리사를 향한 죄책감─그것은 아인이 가장 회피하고자 했던 주제였다. 하지만 카르멘이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한낱 인간에 불과한 아인이 어떻게 그를 막을 수 있었겠는가?─칼리와 다니엘 그리고 벤자민을 향한 친애, 엘리야와 가브리엘을 향한 신뢰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 식어 조금 눅눅하고 질긴 크루아상을 열심히 씹어삼키며 고마움에 대해 이야기했고, 마음의 병에 대해 이야기했고, 새 와인 진열장의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했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인은 의자를 끌어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 앉고는 그 두서와 정보값이 부재한 이야기에 꼬박꼬박 답변해 주었는데, 기실 그마저도 자세히 뜯어 본다면 그저 어설프고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물이 새는 방주에 불과했다. 아인이 도저히 카르멘의 이야기에 제대로 답변하며 호응할 수 없었으므로.

 시간이 가고 있다. 시계 초침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아무튼, 그러니 네가 더 많은 이를 친애하면 좋겠어." 마치 신의 전언이라도 되는 양 허공을 도는 숨 한 톨마저 몽땅 받아 마시던 아인이 얼빠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인다. 조금 구겨진 크루아상 봉투를 펼쳐 꼬깃꼬깃한 쪽지를 접은 카르멘이 말을 이었다.  "많은 이를 사랑하고, 더 많은 이를 친애하고, 그보다도 더 많은 이를 포용한다면 좋겠어." 이 마음의 병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그게 우리가 삶을 바친 이유였으니까. 이어지는 환한 웃음.

 더 견딜 수 없어 아인은 몸을 일으켰다. "카르멘, 그거 줘." "응? 뭐?" "그 봉투 말야. 버리고 올게." "아, 그래 줄 거야? 고마워." 그리고 한숨,

 

 아인이 개인실의 문을 열기 전, 카르멘은 속삭이듯 다시 말을 걸었다. "내가 왜 돌아왔는지 너도 알고 있잖아." 조금 충혈된 눈을 한 아인이 고개를 돌리고, 살풋 웃은 카르멘이 말을 잇는다. "에녹은 돌아오지 않았는데." 할로윈은 잃은 것이 돌아오는 날이라고 하지. 살짝 기울어진 카르멘의 목덜미에 흰 빛이 쏟아져 은은하게 빛난다. 그는 꼭 추락한 천사처럼 보였다. 그리고 애써 웃은 아인이 다시 개인실로 돌아왔을 때,

 남은 것은 조금 은은히 깜빡이다 사라지는 빛무리뿐이었다.

 시계가 자정을 알리고 있다. 아주 본능적으로 아인은 제 죽음을 짐작한다. 앞으로 오로지 오늘만을 위하여 오롯이 바쳐질 제 모든 삶을 회고한다. 그에 대한 유감은 없다.

 아인은 조용히 개인실의 문을 닫았다.

 

 

 8.

 이 땅에서 그녀를 앗아 가지 마오……. ¹

 

 

 

-

 

¹ 안톤 체호프, 귀여운 여인

총 10,60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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