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owery violoncello
2021. 12. 18.Backup/커미션
@KaleiDough 님의 커미션입니다. 대충 필립 이야기.
라오루 메인스토리 완료하지 않으신 분의 열람을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늬앙스적 스포가 가득합니다.
12/18 기준으로 풀린 정보로써 작성된 글입니다. 날조의 비중이 큽니다.
괜찮으시다면 접은 글 열어주세요.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연대기로 쓰여도 싸구려 각본밖에 안 될 내용이라 여겨질 것들이라 생각했다. 이 도시에서 인의대로 지켜나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누구도 이를 선뜻 옳다고 하지 않았고, 가지고 있던 희망은 하찮은 것으로 여겨져 업신여김당했다.
눈을 뜬 곳은 어느 아름다운 신전이었다. 다만 그 신전의 기둥은 곳곳이 갈라져 있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주홍빛 꽃이 기둥을 지지대 삼아 휘감아 피어나고 있었다. 내 삶은 여기서 끝났던 것일까. 지난 일을 곱씹어봤자 다 타버려 흔적마저 희미한 기억에게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무소유의 경지를 의미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남아있는 미련이 속삭인다. 바람을 타고 흘러든다. 이 모든 것은, 그저 내가 지나치게 불운했던 탓이었노라고.
물웅덩이에 비친 나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정리되지 못한 머리카락, 늘 쓰던 안경. 다른 점이 있다면, 잔향악단의 제식 복장을 하고 있다는 정도겠다. 지금 이 광경이 어느 시점 뒤인지, 내가 무슨 일을 겪은 뒤인지조차 정확하지 않았다. 도서관에 몇 번 방문했고, 그다음은…
허무할 정도로 따사로웠다. 평온했다. 분명, 나는 내 의지로 놓아버린 삶이 아니었음에도 결과적으로 그리되었을 터이다. 실없는 농담이나 하면서, 조금 더 인연을 쌓아 올릴 시간이 내게 있었다면. 그런 마음에도 그리움이 차오르며,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맑은 하늘과 잔디가 부대끼는 마당은 이곳이 내 휴식처라는 듯, 그 어떤 말도 얹지 않고 있었다. 얼마나 그런 정적을 유지하고 있었을까, 신전 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입을 열고 탄식한 쪽은 상대였다. 정확히는 눈앞의 ‘나’였다. 그는 차림새만 달랐을 뿐, 얼굴은 나와 다른 곳 하나 없었다. 단지 반쪽짜리 날개가 그와 나의 선을 명백히 그어두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나를 인지한 즉시 내게 무기를 들이밀었으나, 곧 의미 없는 행위임을 알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을 리가 없지.”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어. 그 뒤의 일들이 흘러들어왔으니까.”
아마 ‘내’가 잔향악단에 들어간 일을 말하는 것이겠지. 우리는 ‘서로’가 분리되는 경험을 겪었고, 기묘하게도 이곳에서 다시 마주쳤다. 이것도 도서관의 능력일까? 그렇지만 지금 와서 짐작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상, ‘필립’은 정리할 시간이 분명히 필요한 존재였다.
“처음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같은 건 애초에 말도 안 되겠지. 하지만 그립기도 해. 사람의 정에 연연하지 말라는 말은 지긋지긋했는데도, 계속 붙잡고 있었어.”
“그렇습니까. 지금의 저는,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행복이란 것을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상대의 표정이 묘하게 구겨졌지만, 이걸 대놓고 부정하진 않았다. 하나의 자아에서 갈라져 나온 의견이라는 것은 그간 겪은 일들의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이미 이 시점에서 서로 같은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이렇게 마주하는 성찰의 끝에서 깨달음이란 있을 것인가? 아마 내가 인간인 이상, 그런 완전한 마음가짐을 갖진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도서관을 기점으로 내 삶을 나눠보자면, 그 전은 분명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도서관을 탓할 생각도 없었다. 말로는 공수래공수거하고 있지만, 온기와 그리움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는 점을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었다.
“‘네’ 말도 맞겠지. 하지만 가볍게 여기고 싶지도 않아.”
“생각하기 나름일 겁니다.”
“…그래.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그래서 희망을 품어보고 있어.”
대답 대신 편익의 당신을 쳐다본다. 그 눈에는 여전히 생의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다 타버린 재에게 그건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고, 동시에 무의미의 가치기도 했다. 결정적인 부분에서 우린 엇갈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
적극적으로 반박하고픈 마음도 들지 않았고, 이는 내 눈앞의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대화에서 지금까지 누군 옳고, 누군 틀렸다는 말이 단 한 마디도 안 나왔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이제 상처 입는 것은 충분히 지겨웠다. 말 한마디에 신경이 곤두서는 것만큼 해로운 일이 없었으니. 그렇다면 영양가 없는 소리라도 이어가 보자. 지금 아니면 언제 해보겠는가.
“다시 도시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사실 모르겠어. 그래도 살아야지. 이미 떠난 사람을 계속 그리워할지도 모르고. 이번 일은 내게 교훈적이라거나, 그런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내가 타파해야 할 일에…….”
“내 책임이라고, 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일순 모든 것이 멈췄다. 우리가 놓고, 잃고 온 것은 똑같았다. 단지 그 행보가 얼마나 더해졌는가, 그 차이였다. 주홍빛 꽃잎이 바람을 타고 우리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향기의 화염이 공기를 타오르게 하고 있었다. 상대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상당히 많은 모양이었으나, 사실은 저도, 나도. 이미 처음부터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알고 있었을 터였다. 모를 리가 없지. 서로 마주친 순간부터 지금까지 구태여 대화가 필요한 상대가 아니었음을. 그럼에도 우리는 끝내 입을 열고 이야기한다. 확인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처음부터 잘못이라는 전제를 까는 것이 아니었음을.
“……그러면?”
“불가항력이었습니다. 내 선택으로 좀 더 나아질 수 있는 것도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언제고, 매번 옳은 선택과 생각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조금 더 나를 위한 여지를 두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리고 당신은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거 같고.”
다시 잔잔한 바람이 분다. 느릿한 첼로의 연주처럼, 서로에게 정리할 시간을 늘려준다. 그렇다고 크게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상처 입은 이에게 자비로운 세상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묻고, 답하여도 우린 같은 길을 걷지 못할 것이다. 똑같은 인과, 똑같은 존재, 그런데도 다른 이야기.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에 옅은 물기가 서렸다.
“어떤 이는 이기심이라 해도, 그 이기심으로 돌아가는 세상도 있다고 믿어. 일방적인 선행, 이 부조리 속에서도 누군가 일궈내는 인간성. 나는 그 가치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
“저는 당신이 틀렸다고 하고 싶진 않군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똑같은 눈높이에서 똑바로 그를 쳐다보았다. 결정적인 한 끗의 차이는 타인과 다를 바 없는 골을 만들었다. 허나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를 긍정한다. 긍정하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좀 다른 맥락이었지만 말이다.
“단순한 이견일 겁니다. 나는 이제 불타 사라질 잔향에 불과하겠지요.”
“…같이 나아갈 수는 없겠구나.”
“예. 하지만 그 또한 ‘저’겠지 않겠습니까.”
생각해본다. 이 모든 감정의 시작점을. 세상이 눈부시게 환하고 따뜻했다가, 어느 순간 차갑고 깜깜하게 변하였고, 하루의 정적이 이어졌다. 흔하게 일어날 일은 아니었지만, 그 뒤부터 남들과 비교했을 때 조금은 대역폭이 넓은 감정을 손에 쥐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빛은 내게 따사로웠고, 목소리는 속삭였다. 그리고 우리 둘 다, 우선은 같은 답을 했다. 최악의 말은 아니었다. 그저 나를 위함이라면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나 하나 간수하기 힘든 순간에 그런 위로와 온기가 있다면 누가 섣불리 뿌리치겠는가? 도망이라도 칠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할 수 있었다면. 단언컨대, 이는 모든 인간이 같을 것이다. 이를 직시할 수 있다면 그건 용기일 것이고, 도망친다고 하여 비겁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라나는 이에게는 조금 더 따스함이 필요했을 뿐이겠지. 그렇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고, 내 발이 딛는 곳에서 작은 꽃이라도 피길 바란다.
편익의 나는 무언가를 마음먹은 듯, 나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나 또한 같은 인사로 응했다. 이는 우리가 완벽히 갈라섰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나는 내 차선을 고르기로 하였다. 상대는 어떻게든 최선을 고르기로 하였다. 응원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잔혹할 것이며, 우리가 무엇을 마주해도 대부분 가시밭길임을 인지할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각자의 길을 선택했다. 단지, 그것이 ‘나’를 위한 행복이라면, 재가 되어버린 ‘당신’의 마음에도 삶의 찬가라는 불꽃이 다시 타오르길 바랄 뿐이다. 각자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풍경은 천천히 빛나는 책장이 되어 산화되었다.
다시, 발걸음을 돌리고 나아가자. ‘내’ 생의 찬가는 이제 시작일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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